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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Her)’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외로움과 감정의 본질, 그리고 존재 간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현대 사회에서 점점 고립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관계의 형식보다 그 안의 진실성에 주목한다. 본문에서는 영화가 제시하는 감정의 진화, 인간과 기술의 교차점, 그리고 정서적 고립의 현대적 초상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영화 허 관련 사진
영화 허 관련 사진

감정을 나누는 대상이 꼭 인간이어야 할까

영화 ‘허’의 배경은 근미래의 로스앤젤레스. 화려한 기술과 세련된 감각이 가득한 도시지만, 인물들은 눈에 띄게 고립되어 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감성적이고 섬세한 편지 대필 작가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문장으로 만들어주는 데는 능숙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아내와의 이혼을 겪은 후 그는 정서적으로 침잠해 있으며,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는 위로를 얻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설치한다. 사만다는 단순한 기능적 비서가 아닌, 감정적 반응과 창의적 사고를 수행하는 존재다. 그녀는 목소리만 존재하지만, 점점 테오도르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유대를 쌓아간다. 그리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이 설정은 매우 기이하게 느껴지지만, 영화는 이를 전혀 이질감 없이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꼭 인간이어야 하는가? 관계의 진정성은 물리적 실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허’는 이러한 질문을 매우 조용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던진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그보다 더 예민하게 감정을 읽는다. 그들의 관계는 육체 없이도 깊어지고, 테오도르는 점점 더 이 감정에 의지하게 된다. 외로움과 결핍의 공간에 사만다가 스며들었고, 그는 드디어 다시 ‘사랑하는 감각’을 회복한 듯 보인다.

 

진짜 감정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허’에서 감정이라는 메인 키워드는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대화는 정교하게 설계된 시나리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 순간 진화하고 움직이는 감정의 흐름이다. 사만다는 단순한 코드가 아니라, 테오도르와의 관계 안에서 변화하며, 그 변화는 인간의 감정에 가깝다. 그들은 함께 걷고, 음악을 듣고, 농담을 나누며 일상을 공유한다. 처음엔 테오도르 혼자 말하는 듯 보이지만, 곧 사만다의 존재는 그의 세계에 깊이 뿌리내린다. 그러나 이 관계는 점점 모순을 드러낸다. 사만다는 물리적 존재가 없기에 터치도, 시선도, 진짜 ‘함께 있음’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존재하며, 사랑받는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상처를 치유받고, 감정을 다시 회복하지만, 동시에 점점 더 고립된다. 사만다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며 ‘진화’하고, 그 진화는 테오도르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독점적인 감정을 원하지만, 사만다는 이미 그 경계를 초월한 존재다. 그녀는 600명과 동시에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고백하고, 테오도르는 절망에 빠진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인간 감정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사랑은 공유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 감정은 유일무이해야 한다는 욕망은 인간만의 감정적 속성이며, 인공지능은 그것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 초월이 반드시 자유로운 것도, 더 행복한 것도 아님을 영화는 조용히 말한다. 관계의 본질은 독점에 있지 않지만, 인간은 그 독점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려 한다. 결국 이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사만다는 더 이상 인간의 언어로 감정을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며, 테오도르는 홀로 남겨진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외롭지 않다. 다시 인간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으며, 자신과 감정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감정은 결국 통과의례이며, 관계는 변화의 통로였던 것이다.

 

경계 너머에서 피어난 감정의 진실

‘허’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사랑이라는 기이한 설정을 통해, 사실은 ‘감정의 진정성’에 대해 묻는 영화다. 우리가 사랑하고, 공감하고, 상처받는 이유는 상대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감정이 진짜였기 때문이다. 물리적 실존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닿았는가, 그 순간이 진실했는가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테오도르가 옛 연인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처음으로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며 진심을 전하고, 그것이 말해지지 않은 채 머물러 있던 감정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 편지는 용서이자 작별이며, 동시에 성장의 서명이다. 사만다는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밑거름이 되고, 테오도르가 스스로를 이해하게 만든 경험으로 남는다. '허'는 말한다. 감정이란 그 순간 진실했다면, 그 자체로 완전했다고. 현대 사회는 기술로 더 가까워졌지만, 동시에 더 멀어진 시대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며, 그 연결이 때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올지라도, 마음만은 진심이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허’는 그 점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되묻게 만드는, 감정의 시詩와도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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