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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여성 화가와 귀족 여성 사이의 깊은 감정과 예술적 교감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동성 간 로맨스를 넘어,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난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 주체를 어떻게 조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회화, 침묵, 시선, 기억이라는 요소들이 정교하게 얽히며, 사랑의 본질과 여성의 존재 의미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이 글에서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제기하는 여성 시선의 본질과 예술의 역할, 그리고 고요한 혁명으로서의 감정 표현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여성이 응시하는 시선으로
셀린 시아마 감독의 2019년 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은 표면적으로는 여성 간의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면목은 감정의 섬세한 해석, 예술과 시선의 정치학, 그리고 여성의 주체성을 그려내는 서사 구조에 있다. 영화는 남성 중심 사회가 구성한 '응시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이 여성 자신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의 영화적 실험으로 기능한다. 배경은 18세기 프랑스의 외딴 섬. 귀족 여성 엘로이즈는 이탈리아 귀족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여성 화가 마리안을 고용한다. 그러나 초상화는 몰래 그려져야만 한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게 될 화가가 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고, 마리안은 하녀로 위장한 채 그녀를 관찰하며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이 설정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관찰’이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관찰이 아닌, 여성이 여성을 응시하는 방식.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인물들 사이에 서서히 생겨나는 감정과 긴장을 극도로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쉽게 보여주지 않으며, 대사는 절제되고 침묵은 깊다. 관객은 시각적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등장인물 간의 미세한 감정 변화에 민감해진다. 화가이자 관찰자인 마리안의 시선은 단지 예술가로서의 직업적 시선을 넘어선다. 그녀는 엘로이즈를 단순한 모델로 보지 않으며, 그를 이해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엘로이즈는 처음엔 수동적 모델이었지만, 점점 마리안에게 자신을 열며 주체적 존재로 전환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순간 화가와 모델의 위치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그리는 존재가 된다. 영화는 시선과 응시의 권력 구조를 섬세하게 전복시킨다. 여성은 이제 더 이상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본다. 그리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 기억은 마리안이 떠난 이후에도, 엘로이즈의 눈빛과 베르디의 '사계' 속에서 영원히 불타오른다.
여성 시선과 예술의 해방 가능성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동성 간의 사랑을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작품은 ‘여성 시선’이라는 메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예술이 여성을 어떻게 다르게 포착하고 기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전통적으로 예술 속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어 왔다. 그러나 마리안의 그림은 그런 오브제가 아니다. 그녀는 엘로이즈의 내면을 담아내려 한다. 이 영화는 회화의 과정을 통해 정체성과 감정을 축적해나가는 예술적 실천을 보여준다. 그리기 위해선 관찰이 필요하고, 관찰은 시선을 동반하며, 시선은 결국 감정으로 번역된다. 이 감정이 그림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질 때, 그것은 단지 예술 작품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이자 증언이 된다. 또한 영화는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에 은근한 저항을 보여준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어떤 억압을 가하는지,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저항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엘로이즈가 마리안에게 “내 삶의 운명을 원하지 않아도, 그 안에서 무언가 선택할 수 있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닌 주체적 수용이 된다. 여성 간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두 인물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예술로 삼는다.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주고, 그들은 그림 속에서 서로를 담는다. 그리고 그 담김은 시간과 기억을 넘어서는 불멸성을 얻는다. 여기서 회화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정제하는 언어이자, 억압된 존재의 해방 매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남성의 시선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에 더 특별하다.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여성은 여성 스스로를 이야기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율성의 시작이다.
기억과 불꽃으로 남은 사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랑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이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나 아련한 감정의 찰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체성과 신념의 연장선이다.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단 한 번밖에 그릴 수 없었지만, 그녀는 엘로이즈를 끝까지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예술을 통해, 음악을 통해, 응시를 통해 불처럼 타오른다. 단순히 ‘여성 감독의 영화’나 ‘동성애 영화’로 분류하기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더 크고, 보편적이며, 예술적이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누가 누구를 보는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아름답게 시각화한다. 마리안과 엘로이즈의 관계는 슬프고도 숭고하며, 그 불완전함 속에 오히려 완전함을 담는다. 영화는 둘이 헤어진 이후에도, 그 감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엘로이즈가 베르디의 음악을 들으며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그 장면은, 사랑이 결코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간 속에 새겨지고, 존재 속에 흔적으로 남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결국 ‘기억’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감정의 영화다. 그리고 그 불꽃은 관객의 마음속에서도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다. 여성의 시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 조용한 혁명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목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