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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신체적 제약 속에 살아가는 한 여성과,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된 청년 사이의 관계를 담담하게 그려낸 일본 영화이다. 동화처럼 시작된 사랑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 소멸이라는 형태로 귀결된다. 이 영화는 사랑이란 감정이 항상 고양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음을, 때로는 깊어진 감정이 더 큰 이별을 향해간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준다.
동화처럼 시작된 감정의 서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조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한 여인과 츠네오라는 청년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제는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며,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채 책과 상상만으로 자신을 지켜왔다. 그런 그녀 앞에 무심코 등장한 츠네오는 처음엔 호기심 반, 책임감 반으로 그녀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의외의 속도로 가까워지고, 이내 사랑으로 발전한다. 조제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흔들리지만, 점차 마음을 열고 츠네오와 감정의 교류를 나누게 된다. 여기서 영화는 감정을 천천히, 그러나 깊이 있게 그려낸다. 사랑이란 단지 외형이나 상황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조제는 자신의 장애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만의 내면 세계를 꺼내놓는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를 향해 애정과 연민, 그리고 때로는 갈등하는 감정을 드러낸다. 이 사랑은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 진실되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감정의 서사는 동화로 끝나지 않는다. 현실은 이상을 오래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감정을 품고도 소멸할 수 있다
감정이라는 메인 키워드는 이 영화의 핵심 동력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끊임없이 깊어지면서도, 역설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츠네오는 처음에는 조제를 보호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이 ‘책임’인지, ‘사랑’인지, 혹은 ‘동정’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조제 또한 자신의 장애와 츠네오의 젊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괴리감을 느낀다. 그녀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 감정이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두 사람이 함께 바닷가에 간 장면이다. 그곳에서 조제는 자신의 물리적 한계를 잊고 츠네오와 함께 파도에 손을 담근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이 장면은 사랑이 최고의 순간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순간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츠네오는 점점 현실의 무게에 눌려 조제를 감당하기 힘들어하고, 조제는 그 무언의 이별을 예감한다. 사랑은 깊어졌지만,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볼 수 없게 된 두 사람. 영화는 이별을 폭력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도의 조용함과 체념 속에서 감정의 소멸을 묘사한다. 결국 츠네오는 조제를 떠나고, 조제는 혼자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상상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슬픔과 감정의 잔재 속에서도, 스스로 살아가려는 결의를 다진다.
감정은 때때로 사랑을 초과하는 존재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단지 관계의 유지 여부로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제와 츠네오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거짓이었거나 실패였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사랑은 둘 모두에게 치열하고 진실된 경험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 조제는 자신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감정이란 언제나 결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 과정을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사랑이 끝났다고 감정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품은 경험이 개인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또 다른 시작을 가능케 한다. 조제는 영화의 마지막에 혼자 걷는다. 그녀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이제는 그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감정과 상처, 이별을 통과한 그녀는 자기 세계의 주인이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사랑이 반드시 해피엔딩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준다. 가장 깊은 감정은 때로, 이별 속에서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