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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The Father)’는 치매를 겪는 한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기억의 붕괴와 자아의 흔들림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다. 전통적인 가족 드라마의 외피를 두르면서도, 인지의 혼란을 공간과 연출로 표현해낸 이 작품은 노화와 상실, 그리고 인간 존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본문에서는 ‘더 파더’가 보여주는 기억의 미로, 시간 감각의 파열, 그리고 돌봄의 윤리에 대해 분석한다.

영화 더파더 관련 사진
영화 더파더 관련 사진

붕괴되는 시간 속, 남겨진 자의 감각

‘더 파더(The Father)’는 단순히 치매를 주제로 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잃는 자의 세계’를 안에서부터 재현한 드문 작품이며, 관객은 극의 주인공 앤서니의 시선과 감각을 공유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이 영화는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주인공 앤서니를 중심으로, 점점 무너져 가는 기억과 자아의 조각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엮는다. 영화 초반, 앤서니는 여전히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딸 앤의 간병인을 내쫓고, 자신의 기억에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곧 앤의 얼굴이 바뀌고, 방 구조가 다르게 느껴지며, 과거에 죽은 사위가 다시 등장하는 등 현실이 점점 뒤틀려 간다. 이는 단지 혼란스러운 서사가 아니라, 앤서니의 인지적 현실이 변형되는 과정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이다. 감독 플로리안 젤러는 연극 무대를 연상케 하는 제한된 공간을 통해, 관객이 시·공간적 단절과 불안을 직접 체험하도록 설계한다. 인물들의 얼굴이 바뀌고, 대사가 반복되며, 일상이 퍼즐처럼 재조합되는 방식은 치매 환자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관객은 앤서니처럼 혼란스럽고, 점차 무력해진다. 이처럼 ‘더 파더’는 시점과 구성의 전복을 통해, ‘기억의 상실’을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감각화하는 데 성공한다. 주인공의 불안과 두려움은 극의 구조 자체에 스며들어 있으며, 현실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불안정한 감각에 기대고 있는지를 조명한다.

 

기억의 파편과 돌봄의 윤리

‘더 파더’는 기억이라는 메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노화가 인간 정체성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앤서니가 겪는 인지 기능의 저하는 단지 정보의 소실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존재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는 점점 누가 누구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게 되고, 그 혼란은 공포와 분노, 슬픔으로 분출된다. 이 과정에서 딸 앤은 ‘돌보는 자’로서의 고통을 겪는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절망감에 시달린다. 앤서니는 과거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이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의심하는 낯선 사람처럼 변해간다. 이 관계의 파열은 가족이라는 끈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감정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는 돌봄의 윤리에 대해 말한다. 앤은 자신의 삶과 아버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결국 요양 시설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이는 죄책감과 해방감이 교차하는 선택이며, 누군가를 지키고자 할수록 점점 더 자신을 잃게 되는 돌봄의 역설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노인의 고통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겪는 구조적 소진을 보여주는 정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치매에 대한 의학적 설명이나 연민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관객이 직접 혼란을 ‘느끼게’ 함으로써, 주체의 시선에서 현실을 다시 정의하게 만든다. ‘기억의 부재’는 단지 정보의 공백이 아닌, 삶의 질서와 관계, 정체성의 토대가 사라지는 깊은 위기임을 영화는 거듭 강조한다. 앤서니의 말 속에는 ‘나는 내 잎을 모두 잃고 있다. 이제는 가지뿐이다’라는 고백이 있다. 이 표현은 기억을 나뭇잎처럼 은유하며, 그가 점차 자신을 이루던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을 드러낸다. 그 한마디는 영화 전체의 감정적 중심이며, 인간이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되묻는 철학적 울림을 가진다.

 

사라지는 이름들 속에서 남는 것

‘더 파더’는 기억과 현실, 돌봄과 이별이라는 주제를 감각적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영화는 특정 인물의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기억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자아를 유지한다는 근본적인 전제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기억이 붕괴될 때,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지를 조용히 탐색한다. 앤서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내가 엄마를 찾고 있는 거예요?”라고 묻는다. 이 대사는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 가장 원초적인 감정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기억도 이름도 잃었지만, 사랑받고 싶고, 보호받고 싶은 존재로 남는다. 그 순간, 관객은 비로소 ‘더 파더’라는 제목이 단지 한 명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국 도달하게 되는 한 존재의 상태를 상징함을 이해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우리가 끝내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고요하지만 깊게 남는다. ‘더 파더’는 그렇게, 한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마지막 빛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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